한미 통상 협상을 사실상 총괄해온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8월 15일 0시를 기해 직권면직된 사실이 확인됐다. 이재명 대통령의 결정에 따른 인사로 알려졌으며 산업통상부는 전날 청와대로부터 면직 사실을 통보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여 본부장은 한미 관세협상과 대미 투자, 미국의 무역법 301조 조사 등 핵심 통상 현안을 담당해왔고 면직 직전까지도 경제관계장관회의 등에 참석하며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한미 통상 현안이 진행 중인 가운데 협상 실무 사령탑이 갑작스럽게 교체됐다는 점에서 인사 배경을 둘러싼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여한구 본부장의 직권면직은 인사 시점부터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 본부장은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대미 통상협상의 핵심 실무 책임자로 활동해왔다. 특히 미국과의 관세협상뿐 아니라 대미 투자 이행과 공급망, 미국의 통상 압박에 대한 대응을 담당해온 인물이다. 그런데 면직 직전까지도 공식 일정이 잡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부가 14일 공개한 다음 주 일정에는 여 본부장의 국무회의와 정상경제행사 성과관리 관련 회의 참석 일정까지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15일 0시 직권면직이 이뤄지면서 통상당국 내부에서도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는 관측이 나왔다.
직권면직의 주체와 사실관계도 이전에 제기된 의혹과 달리 상당 부분 확인됐다. 산업통상부 측은 여 본부장이 직권면직됐으며 전날 청와대로부터 통보받았다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보도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이 15일 0시를 기준으로 여 본부장을 직권면직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만 대통령실과 산업부가 공개적으로 밝힌 구체적인 인사 사유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번 조치가 대미 협상 실패에 대한 문책인지, 통상정책의 방향 전환을 위한 인사인지, 또는 별도의 인사 판단에 따른 것인지는 현재 단계에서 단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번 인사를 한미 통상 환경과 완전히 분리해 바라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은 올해 한국을 포함한 60개 경제권을 대상으로 무역법 301조 조사를 진행했고, 강제노동 생산품 수입금지 제도의 이행 여부를 문제 삼았다. 미국 대통령의 7월 23일 대통령 각서에 따르면 한국도 조사 대상에 포함됐으며, 한국산 제품에 대해서는 일정한 예외를 제외하고 최혜국대우 관세와 301조 관세를 합산해 12.5% 수준으로 제한하는 조치가 마련됐다. 이는 한미 간 기존 관세합의와 별개의 통상 압박 요인이 추가됐다는 의미이다.
한미 간 또 다른 핵심 현안은 대미 투자 문제이다. 한국은 지난해 미국과의 통상협상에서 15% 수준의 상호관세 적용을 전제로 미국에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한국 정부는 이후 대미 투자 이행을 위한 제도적 절차를 진행해왔지만 실제 사업 선정과 투자 집행을 둘러싼 세부 사항에서는 양국 간 조율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 역시 한국의 3500억 달러 투자를 미국 제조업과 산업기반 강화를 위한 핵심 성과로 강조해왔다.
8월 들어 이 문제는 다시 한미관계의 주요 쟁점으로 부상했다. 8월 19일 공개된 외교 관련 보도에서는 조현 외교부 장관이 미국의 최근 움직임을 대미 투자와 이란 문제 등에 대한 압박과 연관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언급했다. 특히 한국의 3500억 달러 투자계획은 구체적인 사업과 집행 문제를 둘러싸고 여전히 미국과 조율이 필요한 사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는 여 본부장이 직권면직된 시점과 맞물려 한미 경제관계의 긴장도가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욱 주목되는 부분은 후임 통상교섭본부장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 본부장이 물러났다는 점이다. 한미 통상협상은 단순한 관세 문제를 넘어 조선·에너지·반도체·방산·공급망·대미 투자 등 국가 경제와 직결된 분야로 확대돼 있다. 미국 역시 통상 문제를 산업정책과 경제안보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어 협상 창구의 연속성이 중요하다. 핵심 협상 책임자의 갑작스러운 교체가 협상 전략의 변화로 이어질지, 또는 새로운 협상팀을 통한 대미 관계 재정립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번 인사를 둘러싼 논란은 결국 한미관계의 구조적 문제와 맞닿아 있다. 미국은 관세 인하의 대가로 대규모 대미 투자와 시장 접근 확대, 미국 기업에 대한 공정한 대우 등을 요구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국내 산업과 기업의 이해관계, 법적 절차와 투자 수익성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양국의 요구가 충돌할 경우 통상협상은 경제 문제를 넘어 외교와 안보 문제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